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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의 필요성
만주문자와 여진문자 - 청 제국의 문자
<연규동>

만주문자의 역사


만주어를 기록하는 문자는 만주문자로서, 1599년 학자 어르더니(額爾德尼; 1580~1623)와 신하 까까이(噶蓋; ?~1599)가 누르하치(후에, 청 태조)의 명에 따라 몽골 문자를 차용하여 만든 문자이다. 만주문자는 몽골 문자와 함께 위구르 문자, 소그드 문자, 히브리 문자, 아랍 문자는 물론 더 멀리는 라틴 문자, 이집트 문자 등과도 같은 계통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만주문자의 창제와 반포는 만주족 문화 발전에 큰 역할을 하여서, 만주족이 통치체제를 정비하고 중원에 들어가 패권을 잡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소리 체계가 다른 언어인 몽골어에 적합한 몽골 문자를 그대로 받아들여 만주어를 적기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테면, 몽골문자에서는 k/g/h와 t/d, o/u의 구별이 없어서 서로 다른 단어인데도 똑같이 쓰고 똑같이 읽어야 한다. 한국어 단어로 비유를 들자면 ㄱ/ㅋ, ㄷ/ㅌ, ㅗ/ㅜ 등을 구별하지 않고 적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조’라고 쓰인 단어는 문맥에 따라 ‘다조, 다주, 타조, 타주’ 등 네 가지 읽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문자를 만들어 쓴 지 30여 년이 지난 후, 1632년 학자 다하이[達海]가 초기 만주 문자를 개량하는데, 점(∙)과 동그라미(∘)를 더하여 만주어의 소리를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게 된다. 이 새로운 문자를 동그라미와 점이 있는 만주문자 즉, 유권점(有圈點) 만주문자(tongki fuka hergen i bithe) 또는 신만문(新滿文)이라고 하며, 이와 대비하여 초기의 만주자를 무권점(無圈點) 만주문자 또는 노만문(老滿文)이라 부른다. 무권점 만주문자와 유권점 만주문자를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모음 o를 나타내는 글자에 점(∙)을 가하면 u가 되고, 자음 k를 나타내는 글자에 점(∙)을 가하면 g가 되고, 동그라미(∘)를 가하면 h가 되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몽골문자를 차용한 데에서 오는 혼란도 없어지고 누구나 쉽게 정확한 발음을 구별하여 쓸 수 있게 되었다.


만주문자의 특징


흔히 한글은 자질문자(資質文字)라고 하여 과학적인 문자라고 한다. ㄴ에 가로획(ㅡ)을 더하면 ㄷ이 되고, 다시 여기에 또 한 번 가로획을 더하면 ㅌ이 되는 속성을 이르는 말이다.

        ㄱ → ㅋ
ㄴ → ㄷ → ㅌ
ㅁ → ㅂ → ㅍ
ㅅ → ㅈ → ㅊ
ㅇ →         ㅎ

이러한 의미에서, 만주 문자 역시 자질문자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a] → [e]
[o] → [u]
[t] → [d]
[k] → [g] → [h]

만주문자는 위에서 아래로 세로로 내려 쓰며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행이 이어진다. 또한 같은 글자라도 단어의 처음과 중간, 마지막 위치에 따라 그 모양이 달라지기도 한다. 이처럼 글자의 배열 위치에 따라 글자의 모양새가 달라지는 경우는 아랍 문자부터 이어져 온 특징이다. 기본적으로는 음소문자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완전한 음소 단위의 문자가 아니라 음절 문자적인 속성을 일부 지니고 있다.

유권점 만주문자


글을 쓰는 관리 - 비터시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각 부서의 대신들은 만주족이었지만, 실무를 맡은 다수의 관원들은 한족으로 상호 간의 의사소통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게다가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던 청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각종 서적을 만문으로 번역하여 최고 지배자를 비롯한 상층부의 정치, 사회,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으며, 또한 청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이웃 나라와 소통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번역 특히 한문 문서를 만문(滿文)으로 번역하거나 또는 그 반대의 작업을 수행하여야 했다.


이와 같은 배경 아래에서 청나라에는 계심랑과 비터시[筆帖式]라는 독특한 관료 계층이 출현하게 된다. ‘계심랑(啓心郞)’은 이미 후금 때부터 있었던 관직으로, 한어와 만주어 또는 몽골어에 능통한 이들을 계심랑으로 선발하여 통역과 번역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강희제 때에 이르러 만주족이 한문과 한어를 익숙하게 되면서 폐지된다. 또한 ‘비터시[筆帖式]’는 글을 의미하는 만주어 bithe에 사람을 의미하는 -si가 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로서, 상소문 등 문서의 작성, 번역, 관리 등의 업무를 맡은 하급 관리이다. 이들은 만주어 또는 한어로 번역하는 일이 주 업무로서 두 언어에 모두 능통한 자들이 선발되었는데, 중앙의 각 부서는 물론이고 지방과 역참, 국경지역에 모두 배치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중국 고전의 만주어 번역과 사전 편찬


청나라는 초기부터 만주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많은 중국의 경전과 역사, 문학 관련 문헌들을 만주어로 번역한다. 한문화와 한어로부터 만주 문화와 만주어를 살려내고자 하는 노력의 결과였다. 특히 강희제가 대륙을 평정하고 국력이 강하여지자 만주어는 ‘국어’(國語)로 대접받으며 전국적으로 사용되었다. 일부 한족 지식인들도 만주어를 학습하고 청나라에서도 만주어를 적극 장려하여 만주어 또는 만한합벽으로 쓰인 출판물도 쏟아져 나왔으며, 수많은 한문 경전, 역사책 등이 번역되었다. 그 중 몇 가지만 예를 들면,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시경>, <효경>, <소학>, <손자병법>, <삼국지>, <서상기>, <금병매>, <요재지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만주글로 한문을 대치해 나가려는 생각으로 만주어 사전의 편찬에도 많은 힘을 쏟아, 1708년(강희 47) 강희 황제의 지휘 아래 (임금이 지은 만주말의 거울책)이 편찬된다. 이 책은 만주어를 표제어로 하고 만주어로 뜻풀이를 붙인 사전으로, 흔히 <어제청문감>(御製淸文鑑)이라고 불린다.


<어제청문감>
<오체청문감>


























만주어를 일종의 민족 자부심이자 자기정체성의 문제와 깊이 연관시켜 생각하였던 건륭제는 1750년대 말부터 만주족의 언어 및 역사와 관련된 책들을 저술하라는 조서를 내리고, 1771년(건륭 36, 조선 영조 47)에는 만주어사전인 <어제증정청문감>(御製增訂淸文鑑)을 간행한다. 이 책은 조정에서 이미 사라져가던 언어를 체계화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위엄을 갖추게 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이 후 나온 중요한 사전 중 <사체청문감>(四體淸文鑑), <오체청문감>(五體淸文鑑)은 여러 언어의 대조사전으로서, 청의 영토가 점점 넓어져 이민족들이 청의 울타리 안에 들어옴으로써, 서로 다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하는 민족들이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증진하도록 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사체(四體)란 만주어, 티베트어, 몽골어, 한어를 의미하며, 여기에 위구르어를 추가하면 오체(五體)가 된다.


17~8세기에 중국에 온 유럽 학자나 예수회 선교사들은 만주어와 만문 자료에 주목하게 된다. 중국의 옛 문헌들을 통하여 중국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유럽인들에게 한문 서적을 해독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중국의 중요한 서적이 거의 만주어로 번역되어 있었기에, 배우기 어려운 한자보다는 표음문자인 만주 문자로 이루어진 만주어 번역서를 통해 중국 문화에 접근하려고 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한문에 익숙한 유럽학자라 할지라도 만주어로 정확히 번역되어 있는 서적을 참고하면 한문 원본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리하여 당시 유럽의 중국 학계에서는 각종 만주어 연구서ㆍ사전ㆍ교재 등이 출판되었다. 그들은 만주어를 마치 한자로 된 중국 문헌의 미로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여겼다고 한다.


유럽 선교사들이 번역한 만주어 성경




여진문자


여진어는 두 종류의 여진문자로 기록되었다. 1119년에 금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명에 의해 완안희윤(完顔希尹)이 한자와 거란 문자를 본따 만든 문자를 여진대자(女眞大字)라고 하며, 이후 1138년에 금 제3대 희종(熙宗)이 여진대자를 간소하게 만들어 사용하게 한 문자를 여진소자(女眞小字)라고 한다. 여기에는 한족의 문화에 맞서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려 했던 여진족의 의도를 볼 수 있다.


금나라 처음에는 국가 사업의 일환으로 경서를 번역하고 여러 문서를 만들기도 하고 문자의 습득을 의무화하고 여진문자 학교를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여진문자는 한자와 비슷하면서도 일반 서민은 쓰기 어려운 문자여서 충분히 보급되지 않았으며, 여진어음을 표기하는 데에는 지나치게 획이 많고 여러 가지 불편이 있었으므로, 여러 문서에 한자를 사용하는 일이 보편화되었으며, 이후 여진문자는 점점 사라져 갔다. 금나라가 망한 후, 원나라 때에는 여진문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만주 지방에서 조금씩 사용되다가 명나라 이후에는 여진문자는 완전히 사라지고 만다.


현재 남아있는 주요 여진 문자 자료는 명대에 편찬된 <여진관역어>(女眞館譯語) 등이 있다. 이 책은 여진문자로 여진어를 표기하고, 이에 해당되는 중국어를 한자로 그 왼쪽에 조금 큰 글씨로 쓴 후, 다시 그 왼쪽에 여진어의 발음과 같거나 유사하게 한자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明     根見
        四     都因/對因

여진어 는 ‘밝다[明]’에 해당하는데, 그 발음은 ‘根見’이라는 뜻이다. ‘밝다’라는 뜻을 가진 만주어 genggiyen과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여진어 는 ‘넷[四]’의 뜻을 가진 단어로서, 그 발음 都因/對因은 만주어는 duin을 연상할 수 있다.